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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22대왕 정조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 2024. 4. 8. 17:05

    정조

    이산

     

    재위 기간 : 1776 ~ 1800

     

    출생/사망일 : 1752년 ~ 1800년 

     

     

    근면하고 똑똑하며, 정직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불안정한 시기에 있었고, 그의 개혁 시도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정유역변 :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다. 


    1785년 발간된 법전.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을 만들었다. 


    홍국영은 왕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 1779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 사망했다.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영조는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등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선왕은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즉위 이후 왕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을 통해 추진하였다.


    왕은 규장각의 설치해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선왕 영조를 계승,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탕평책의 추진과정에서 정권의 물리력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 내에 검서관제도를 두어, 서얼신분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등을 등용하였다.


    그의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고, 그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선왕이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신하들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문지치’와 ‘작성지화’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였다.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업적은 "일성록"의 편수,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장용영의 설치, 형정의 개혁, 궁차징세법의 폐지, "자휼전칙"의 반포, "서류소통절목"의 공포, 노비추쇄법의 폐지, 천세력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로 간행되었다.


    제2의 세종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안타깝지만,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조선 후기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되는 한편 그의 사후 조선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인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의 씨앗을 만든 당사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승하하기 2년 전인 즉위 22년 '만천명월주인옹' 이라는 새로운 호를 다시 지었다. 


    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수민묘전"이라는 의학서적을 정리한 임금이다


    수원 화성의 공사 책임자는 채제공이었다.


    화성 축조의 모든 기록을 정리하여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였다


    수원 화성까지 능행에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새롭게 길을 닦았는데 이 길이 시흥대로의 시초이다.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한 사건이 적발되면서 정약용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이 조상 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모두 불태워 땅에 묻었으며 어머니의 상례를 전통적인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 참수를 당하는데, 천주교 교계에서 최초로 여기는 천주교 탄압이 발생한다. 


    왕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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