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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21대왕 영조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 2024. 4. 8. 17:08

    영조

    이금

    재위 기간 : 1724 ~ 1776

    출생/사망일 : 1694 ~ 1776

     

    그의 뛰어난 교양과 지식, 그리고 도덕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미학적인 감각과 문화적인 관심, 그리고 교육적 열정은 그를 인간적으로 귀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식과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의 엄격하고 냉소적인 면모, 그리고 가끔의 고집과 완고함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통치가 너무 이념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영조의 인간적인 평가는 복합적입니다. 그의 교양과 미덕은 인정받지만, 그의 통치 스타일과 인간적인 한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장려하고, 균역법을 실시해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으며, 양반들이 백성들에게 사사로이 형벌을 주지 못하도록 했다.


    당파와 상관없이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다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재위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습니다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을 일으킨다.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대비 김씨의 삼종혈맥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선왕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삼수옥"이 발생


    노론정권을 구성하면서 노론4대신을 위시하여 "임인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처분"을 단행하였다.


    왕과 집권 노론 측의 패쇄적 인사 정책과 정치 보복이 강화됨에 따라 정치권에서 소외된 사족층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인 잔반, 그리고 향임과 하층민까지 연대해 "무신란"을 일으킨다.


    즉위 3년에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도록 정국의 인사를 개편하는 "정미환국"을 시행한다.


    자신의 4대 사업으로 손꼽았던 이조낭관통청권의 혁파, 한림회천법의 회권법으로의 전환, 균역법.산림의 정치적 위상 격하와 같은 개혁을 성사시켰다.


    세자가 노론과 부왕 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뒤 사망한 사건인 임오화변(임오옥)이 발생했다.


    압슬형 폐지, 추형 금지, 사용수에 대해 형살에 신중을 가하게 하고, 용형도 엄금했다. 


    남형과 경자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개천(청계천)을 준설하게 하고, 이어 준천사를 설치, 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민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감란록"을 반사하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게 했고, 이황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속병장도설", "누주통의"를 편찬하였고,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을 간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그는 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는다


    그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사소한 일로 관리들을 일시에 파직시켰다가 다음날 바로 복직시키는 경우가 흔하였고,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기로과(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다.


    그의 능인 원릉은 1776년 7월 27일 조성되었으며,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어있다. 


    성리학적 지식과 학문이 뛰어난 그는 스스로 어제자성편을 비롯하여 어제경세문답등의 글을 짓기도 하였다.


    30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게 즉위했지만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다.


    공식적으로 세제로 임명된 한국사에서 유일무이한 공식 왕세제(王世弟)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금주령을 내렸는데, 왕 자신도 몰래 술을 마셨다.


    그는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었고 아침은 타락죽, 점심 저녁은 간단한 채소류와 장류뿐이었을 검소하고 절제하는 왕이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가 먹었던 음식은 당시에 상당히 고급 식재료였다.


    여자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 연과 여(왕실 가마)의 금박을 주석으로 교체시켰다. 


    그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명군 혹은 성군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과 심각한 권력욕, 실속은 없고 공허한 정책들과 그로 인해 심화된 조선의 병폐에 초점을 맞춘 부정적 평가가 있다. 


    1954년에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다른 조선 왕들의 어진들이 대부분 손상되었지만 그 혼자만 어진 2축을, 그것도 모두 얼굴이 100% 멀쩡한 상태로 건져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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